에너지정책소통센터란?
에너지정책소통센터는 국민들이 최신 에너지 뉴스 · 정책과 다양한 에너지정책을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산업통상자원부 및 에너지 유관기관이 공동으로 에너지 정보를 통합 제공하는 플랫폼입니다.
* 운영기관 : 한국에너지정보문화재단
레이어닫기최초의 에너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한계를 극복하고 발전을 이룬 역사와 에너지 사용으로 인해 직면한 위기 및 해결방안을 알아봅시다.
무쇼가 파리박람회에 출품한 태양열 수집 장치. 오늘날의 태양열 수집 장치와 거의 비슷하다.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8세기에 이르자, 석탄이 정말 무한한 자원인가?라는 의문이 영국에서 시작되어 대륙으로 확산됐다.
근거는 통계에 있었다. 19세기 초반 영국의 경제학자들은 급속한 경제 성장에 따라 자원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생각했다.
기하급수적 성장에서는 몇 해만 지나도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수요량이 늘어나므로 자원이 얼만큼 존재하든 머지않아 고갈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멜서스 트랩’의 자원 버전인 셈이다. 이러한 논의는 19세기 말엽 독일에서도 이어졌다.
산업혁명 후발주자로서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광대한 식민지 네트워크를 갖추지 못했기에 그리 넓지 않은 본국에서 수급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이 중요했다.
독일의 산업계와 정치권은 에너지 부족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고, 학자들이 이에 대해 광범위하게 토의했다. 열역학 법칙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udolf Julius Emanuel Clausius)도 1885년 발간한 저서 “on nature's energy reserves and their utilization for the benefit of mankind”에서 석탄의 고갈가능성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해 논의했다.
클라우지우스는 석탄을 낭비한다면 에너지원 부족으로 성장의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며 ‘현명한 경제’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는 독일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베버는 화석연료의 종말이 현대 경제질서의 종말과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한편으로는 다른 길을 모색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는 화석연료의 시대가 끝나더라도 태양의 에너지에 기반을 두어 문명이 유지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1909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twald)는 인류가 화석연료를 사용한 탓에 과거의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외면하게 됐다고 지적하며 지속가능한 경제는 태양의 복사에너지를 이용할 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입에 이미 화석연료 이후를 고민하는 현대와 비슷한 인식을 보인 셈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이미 에너지원 다변화의 기본 전제가 심도깊게 논의되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학술적인 고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1912년에 이르자 이탈리아에서 구체적인 행동전략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화학자 쟈코모 치아미치안(Giacomo Ciamician)은 후에 <사이언스>지에 게재된 그의 강연에서 석탄을 태우는 대신 인공광합성으로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단순히 기술이 충분히 발전한 열강에서 더 오래 경제적 번영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원을 찾아보자는 수준이 아니었다.
치아미치안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 ‘잘 사는 북반구와 못 사는 남반구’라는 세계적 수준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태양에너지를 제시했다.
치아미치안의 아이디어는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이용할 만한 인프라가 부족한 적도 지역의 저개발국에 태양에너지를 공급해 격차를 줄이자는 것이었다. 저개발국 입장에서는 석탄을 수입하지 않고도 에너지 인프라를 열강 수준으로 올려 경제발전을 기대할 수 있고, 열강 입장에서는 소비시장의 구매력이 오르니 지속적인 매출 상승을 기대할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이러한 흐름은 세계대전을 맞아 잠시 중단되고 뒤이은 저유가 호황으로 명맥이 끊기는 듯했지만, 석유파동이 전 세계를 강타한 이후, 그리고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진 이후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세기 들어 화석연료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며 많은 사람들은 그 대안으로 재생에너지에 주목했다. 공학자 찰스 브러시는 1888년 풍력발전기를 자신의 농장에 설치해 그 가능성을 널리 알렸다. 증기기관, 내연기관, 정제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에너지 활용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인류는 화석연료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탄소에너지를 물리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급격하게 생산량을 늘리고, 활동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은 인류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줬다.
당시 산업이 가장 발달한 국가였던 영국을 중심으로 석탄 고갈론이 점차 고개를 드는 한편, 지나친 인구 성장에 대한 경고도 잇따라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경제학자 토마스 맬서스가 제시한 일명 ‘맬서스 트랩’이다.
식량 생산 속도가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기에 인구를 제한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새로운 에너지원의 발견으로 유례없는 풍요를 누리던 당시 인류는 이렇게 ‘화석연료의 유한성’ 그리고 ‘인구 증가에 대한 우려’와 함께 20세기를 맞이했다. 이에 사람들은 화석연료 대신 지속가능성을 가진 에너지원, 즉 태양, 바람과 같은 자연의 에너지에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됐다.
기술발전을 바탕으로 이들의 에너지를 전기로 바꾸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이를 활용해보려는 움직임이 생겨난 것이다.
미국 발명가 찰스 프리츠는 1883년 셀레늄과 금을 활용해 최초의 태양전지를 제작했다. 이 태양전지는 변환효율이 고작 1%에 불과했지만, 많은 엔지니어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이는 다양한 방식의 태양 전지 연구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1954년 미국 벨연구소에 의해 실리콘 태양전지가 개발되기에 이른다.
실리콘 기반 태양전지는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고 있다. 1887년에는 제임스 브리드가 최초로 바람에너지를 전기 생산에 활용했다. 그는 풍차가 돌아가는 힘으로 배터리를 충전했으며, 이듬해인 1888년에는 찰스 브러시가 본격적인 풍력발전의 장을 연다.
그가 건설한 풍력발전기는 백열등 350개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었으며, 20년간이나 운용됐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농장들은 넓은 부지에 비해 전기 인프라가 부족해 일종의 분산전원 형식으로 풍력을 많이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수력발전 역시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다. 1882년 미국 위스콘신 주에 최초의 수력발전소가 설치됐으며, 1891년에는 독일 란펜에서도 수력발전이 이뤄졌다. 특히 란펜의 수력발전기는 교류전류를 생산해 110마일 가량 떨어진 프랑크프루트까지 송전에 성공하며 전력 수요지와 생산지가 멀다는 수력발전의 단점을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결국 오늘날 대세로 자리잡고 있는 태양광, 풍력 등의 재생에너지는 최근 들어 갑자기 떠오른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비록 쉽고 빠르게 사용 가능한 화석연료가 대세가 되었지만,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재생에너지는 관련 기술을 발전시키고 그 장점을 조금씩 설파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결국 화석연료로 인한 기후변화가 모두의 관심사가 되자, 재생에너지는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참고로, 19세기 유럽을 강타하던 석탄 고갈론은 그보다 더 뛰어난 화석연료(석유)의 확산으로 사그라들었다. 석탄 수요 자체가 크게 줄어 고갈에 대한 우려가 줄어든 것이다.
20세기 중반부터 유행하고 있는 석유 고갈론 역시, 고갈 우려가 없는 재생에너지의 확산으로 조용히 역사의 뒷장으로 퇴장할지 모른다.
1952년 12월 런던에서 발생한 그레이트 스모그(Great Smog)는 약 1만2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며 환경오염의 위험성을 널리 알렸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4자성어가 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따라 온다는 옛 성현의 지혜다. 화석연료의 막대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인류에게 풍요로움을 안겨준 산업화 역시, 그만큼의 부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환경오염이다.
산업혁명의 근원지인 영국은 석탄 때문에 오래 전부터 골머리를 앓았다. 1273년 이미 석탄 사용량을 줄이라는 왕령이 발표될 정도였는데, 대기오염이 당시부터 심각했다는 얘기다.
당연히 산업혁명 이후에는 오염이 더욱 심해져, 1952~1953년에는 스모그로 인해 약 1만2천 명이 사망할 정도였다.
공장에서 나온 폐수는 강과 바다를 마구 오염시켰다.
이는 특히 콜레라와 같은 수인성 전염병 창궐로 이어져 또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됐다. 결국 1956년 영국에서 청정 대기법(British Clean Air Act)이 제정되는 등 인류는 1950년대 이후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1962년 발표된 레이첼 카슨의 저서 ‘침묵의 봄’은 이러한 환경주의가 전 세계로 퍼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카슨은 살충제인 DDT의 부작용을 적나라하게 고발함으로써, 문명의 이기가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인류는 이제 진지하게 문명과 환경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지구 온난화’였다.
산업혁명 이후 130여 년 동안 지구 온도가 약 1.1℃나 올라간 것이었다. 더불어 기온 상승 속도 역시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장 큰 원인은 화석연료 사용으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늘어난 것이었는데, 결국 경제활동 활성화가 온난화로 이어지며 호사다마가 현실화된 것이다.
온도 상승과 함께 지구 곳곳에서 이상기후가 발생하고, 해수면이 높아지며, 극지방의 얼음이 녹는 등 위험신호가 감지됐다. 이에 각국은 1972년 스웨덴에서 환경보호를 위한 최초의 국제회의(유엔인간환경회의)를 개최하며 사태 해결에 힘을 모으기로 합의했다. 환경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국제기구인 ‘유엔환경계획’도 설립됐다.
이를 통해 인류는 대기 중 탄소를 줄여 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탄소중립(이산화탄소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에 힘쓰기로 다짐하고, 각국별로 탄소감축 목표를 발표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 전 세계 국가들이 친환경차를 만들고, 탄소배출에 세금을 부과하고, 석탄 발전소를 줄이고, 해마다 모여 약속을 하는 것이 모두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